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조선 천주교의 사목권을 받은 프랑스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의 성직자로 조선에 최초로 입국한 모방신부는 장차 조선 천주교회를 이끌어나갈 방인 사제를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신앙심과 총명함으로 주목을 받았던 김대건은 모방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충남 청양 다락골 출신 최양업 토마(성 최경환 프란치스꼬의 아들)와 충남 홍성 출신 최방제 방지거(최한지의 아들)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모방 신부는 박해 때문에 국내에서는 조선인 성직자 양성교육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신학생들을 파리외방전교회 동양대표부가 있는 마카오로 보내기로 했다. 모방 신부는 세 소년을 마카오로 유학시키기 전에 반년이상이나 라틴어와 해외유학에 필요한 기본 지식을 적접 교육하였는데 총명이 남다른 세 소년은 훌륭하게 배움을 깨쳤다. 신학 공부를 위해 1836년 12월 2일 서울을 떠나기 전, 앞으로 공부하게 될 신학교 교장에게 순명할 것과 교구 신부가 되어 열심히 봉사할 것을 서약하였다. 그리고 12월 3일 중국으로 귀환하는 유방제(劉方濟) 신부와 정하상(丁夏祥) .조신철(趙信喆) 등 신자들의 인도를 받으며 변문으로 떠났다. 이때 조선인 신자들은 변문에서 새로 입국하는 샤스탕(Chastan. 鄭) 신부를 맞아들여 귀경하였고, 세 신학생들은 샤스탕 신부를 안내한 중국인 안내원들을 따라 중국 대륙을 가로질러 남하하여 1837년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조차지(租借地)로서 서양인들이 극동 진출의 근거지로 삼은 곳이며 동양 전교 활동의 거점이었다. 출발할 당시에는 세 신학생들이 공부할 장소가 결정되지 않았었다. 이들은 파리 외방전교회가 운영하는 동양인 성직자 양성소인 페낭 신학교에 갈 수도 있었지만 당시 이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중국인 신학생들이 소요를 일으킨 일이 있어서 면학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은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 대표부에 조선인 신학교를 세워 교육을 맡았다. 세 신학생들은 현지에서 일어난 민란으로 인하여 1837년 8월과 1839년 4월, 두 차례나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신하였다. 그때마다 신학생들은 그곳에서 몇 개월 동안 공부하다가 마카오로 다시 돌아오곤 하였는데, 이런 와중에 신학생인 최방제가 1838년 11월 27일 열병으로 죽었다. 김대건의 건강 역시 좋은 편은 아니었다. 두 신학생은 1841년 11월 철학 과정을 마치고 신학 과정에 들어갔다.
1842년 아편 전쟁이 끝날 무렵, 두 신학생은 아직 수학 중이었지만, 프랑스 함대의 함장 세실(C?cille)은 마카오 대표부를 방문하여 조선 원정 계획을 알리면서 조선인 신학생 한 명을 통역으로 동행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몇 년째 조선 교회로부터 소식이 끊겨 있었던 터라 대표부 신부들은 이번 일을 하느님이 주신 기회로 여겼다. 김대건은 조선 포교를 지망한 메스트르(Maistre, 李) 신부와 함께 2월 15일 에리곤(?rigone)호를 타고 마카오를 출발했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는 1842년 8월 29일 중국이 영국과 남경조약(南京條約)을 체결하자 조선 출동을 중단하고 마닐라로 회항하였다. 그래서 김대건은 하선하여 강남 교구장 주교 베지(B?si)의 도움을 받아 중국 배를 타고 귀국 길에 오르게 되었다.
10월 2일 상해를 떠난 그는 10월 23일 요동 땅에 도착하여 백가점(白家店)에 머물면서 3차에 걸쳐 의주 변문을 통한 잠입로를 개척하고자 시도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1843년 4월부터 거처를 소팔가자(小八家子)로 옮겨 최양업과 같이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이곳에는 1841년부터 페레올(Ferr?ol, 高) 신부가 머물고 있었다. 김대건은 1843년 12월 양관(陽關)에서 있은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성성식에 참석한 후 주교의 지시를 받고 1884년 2월 두만강을 통하여 입국을 시도했었지만 실패하고 소팔가자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해 12월 최양업과 같이 소정의 신학과정을 마치고 삭발례부터 부제품까지 받았다. 그들은 사제품의 법정 연령인 만 24세 미만이므로 사제품을 받지 못하였다. 김대건은 1845년 1월 1일 변문을 무사히 통과하여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