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아버지 김제준(이냐시오)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하였고 어머니는 일구월심으로 아들이 돌아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대건 부제는 본인이 조선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어머니에게 알리지 말라고 교우들에게 부탁하였다. 임시 귀국이라 할 일이 너무 많았고 어머니를 만나면 마음이 약해질까 봐 그러했다.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데다가 중병까지 앓으면서 귀국후 3개월 동안 그는 신학생을 뽑아 교육하고, 선교사를 모셔 오기 위해 밀입국로를 조사하고 지도를 그리며, 또한 순교자들에 대한 사적 자료를 수집하였다.
마침내 1845년 4월 30일 만주에서 입국의 손길을 기다리는 조선 교구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 주교님과 다블뤼 신부를 모셔 오기 위해 1백 50냥의 돈으로 한 척의 배를 사가지고 현석문 등 11명의 신자와 함께 그 배를 타고 한 개의 작은 나침반이 가리키는 대로 중국 상해를 향하여 떠났다. 11명의 신자 중에는 1명의 목수와 4명의 어부와 배를 타 보지도 않은 6명의 농부가 있었다. 이들은 김대건 부제를 익숙한 뱃사람으로 믿고 있었다. 배를 띄운 첫째 날에는 순풍에 돛을 달고 잔잔한 파도 위를 달렸으나 다음날부터는 폭풍우를 만나 3일 동안을 밤낮 할 것 없이 시달리게 되었다. 배가 뒤집힐 듯 몹시 흔들렸으므로 할 수 없이 김대건 부제는 끌고 가던 뗏목을 끊어 버렸다. 그 다음은 두개의 돛대를 베어 버리고 무거운 짐들도 물에 던져 버리게 하였다. 뱃사공들은 배멀미에 시달려 넓고 바다 위에서 방향조차 잡을 수 없었으므로 모두 죽을 지경이었다. 김대건 부제도 배멀미에 몹시 시달렸으나 힘써 아무렇지 않은 듯이 보이고 성모 마리아의 성화를 내보이면서 "겁내지 마시오. 성모 마리아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라고 하며 모든 사람을 격려하였다. 배는 여전히 사나운 파도 때문에 이리 저리 들까불리다 가장 중요한 키조차 부러지고 말았다. 할 수 없이 돛을 둘둘 말아서 키 대신으로 쓰게 하였으나 이것조차 얼마 안가서 부러져나갔다. 이에 다시 멍석 을 나무토막에 싸매어 키로 써 보았으나 이것마저 바람에 날아가버렸다. 모두들 기진맥진하여 모든 것을 하느님과 성모님께 맡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열심히 하느님의 도움을 빌다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는 다행히 바람이 자고 비도 멈추어서 모두 이제는 살아났다고 하며 나무 조각을 주워 모아 급한 대로 키와 돛대로 쓰게 하고 바람을 거슬러 항해를 계속하였다. 이리하여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도우심과 성모님의 보호 아래 김대건 신부의 대담함과 침착함으로써 6월 4일 상해에 도착하였다.
조국 동포들이 참석한 가운데 페레올 주교님의 집전하에 상해 연안에 있는 금가항(金家港)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날이 1845년 8월 17일, 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님과 다블뤼 신부를 모시고 8월 30일 상해를 출발하여 다시 뱃길로 귀국하게 되는데, 이때도 폭풍을 만나 제주도 가까이까지 표류하였다가 40여일 만인 1845년 10월 12일 마침내 강경 황산포 나바위에 상륙하여 무사히 서울로 잠입하였다.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님이나 다블뤼 신부보다 월등한 위치에서 전교 활동을 펼 수 있었는데, 언어나 활동의 제약이 덜했기에 입국하던 해 11월과 12월 사이에 서울과 경기도 용인의 은이공소의 교인들을 찾아다니며 사목활동을 하였다. 경기도 용인 산속 은이 공소에는 그의 동생 난식과 어머니가 살고 있었다.
이상 두 달이 김대건 신부가 조선에서 한 사목방문 활동의 전부다. 그의 교회활동은 선교사의 입국통로를 개척하는 일에서 시작하여 그 사명을 수행하는 일에서 끝났다. 그의 말년의 직책은 조선교구의 부교구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