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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와 장례식

1845년부터 1946년 중반까지 페레올 주교, 안다불뤼 신부, 김대건 신부 등 세 분의 성직자가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1846년(헌종12년) 5월 14일 김대건 신부는 주교로부터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사영입 방도를 개척하라는 지시를 받고, 만주에서 기다리고 있는 메스트르 신부와 동료인 최양업 토마의 입국을 위해서 주교님의 편지와 입국할 사용한 해상지도를 가지고 백령도 해역 순위도로 갔다. 고기잡이 나온 중국 어선에게 편지와 지도를 전달하고 돌아 오다가 6월 5일 관헌들에게 체포되었다. 체포된지 10일이 되던 날 김대건 신부는 해주 감옥을 거쳐 6월 21일 서울로 압송되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를 포청에서 3개월 동안 40차의 문초를 받는 취조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관리들은 일찍이 조선 천주교회를 위하여 6년간의 마카오 유학과 4년간의 중국 만주 대륙에서의 수학과 활동을 통해 얻은 김대건 신부의 신학문에 대한 조예와 서양어(라틴어, 불어)는 물론 중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사실 김 신부는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처음 서양 학문을 정식으로 공부하였고 여러 나라의 외국어를 구사하였다.

김대건 신부는 옥중에서 당신을 교육하고 꾸준히 돌보아 준 마카오 장상 신부들에게 조선교회의 장래를 부탁하는 서한을 남겼고, 페레올 교구장님에게 조선교회의 모든 일을 당부 드렸으며 어둡고 더러운 옥중에서 형벌로 상처난 아픔을 참아 가며 그가 돌보던 조선 교우들에게 이별을 고하는 회유문을 남겼다.

"사학죄인(邪學罪人) 김대건응 효수(梟首)토록 하라." 헌종실록 제13권은 김대건 신부에 대한 1846년 7월25일의 최종판결을 이렇게 적고 있다. 그리고 사형집행을 미루다가 그해 9월 15일 헌종은 집행명령을 내려 다음날 9우러 16일 서울 한강 백사장인 새남터에서 집행되었다. 12명의 회자수가 내리치는 칼날 중에 8번째에 가서야 목이 떨어졌다.

김대건 신부의 시신은 순교 직후 새남터 모래톱에 매장되었다. 순교한지 40여일 지난 10월 26일에 8명의 신자들이 상여를 이용하여 김 신부님의 시신을 운구하여 미리내(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미산리)에 정식으로 매장하였다.

현재 김 신부의 유해는 여러 곳에 분산 봉안되어 있으며, 솔뫼 성지에도 김 신부의 유해 일부와 조선교구 2대 교구장인 앵베르 주교?모방 신부?샤스땅 신부 등의 머리칼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